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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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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리학교실 교실소개
1885년 알렌(Dr. Horace N. Allen)이 갑신정변으로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하고 고종에게 건의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을 세웠다(4.10). 개설 직후 광혜원은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4.26).
1886년 알렌은 16명의 학생을 선발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학교육을 시작하였다.
1899년 에비슨(Dr. Oliver R. Avison)은 정규 제중원 의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현대적 의미의 약리학을 가르치고 정착시켰다. 에비슨은 카나다의 Toronto대에서 약학과 의학을 전공하여 한국에 오기 전 Toronto 의과대학에서도 약리학을 담당한 바 있다.
1903년 제중원 의학교가 세브란스 의학교, 사립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로 개칭하였다. 교과목에 정규 약리학 강좌를 두고 ED Cook(1917-1919), GLR Taylor(1919-1923), 무라오카(村岡, 1922-1923)가 각각 약리학을 강의하였다. 그 뒤를 이어 세브란스의약품상회 사장이면서 세브란스병원 약국장이던 이관영(1923-1933)이 강의를 계속하였으며, 와다나베(渡邊甲一, 1931)가 강사로 강의를 하였다. 1933년부터 경성제국대학 약리학 교수 오자와(大澤勝)가 강사로 약리학 강의를 맡았다. 그러나 1899년부터 1935년까지는 약리학 강좌만 있었을 뿐 독립된 교실은 없었다.
1935년 4월 이세규가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에 임용되면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약리학교수가 되었고 처음으로 약리학교실을 창설하였다. 당시 이세규의 교수실은 외래진료소 건물 2층 강의실 옆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2년간은 주로 학생강의만 담당하였다.
1937년 주부생이 조수로 임용 되어 외래건물 3층 창고를 약리학 실험실로 개조하여 두꺼비 간장의 출당기능에 관하여 실험하였다.
1941년 주부생이 게이오 대학 의학부로 유학을 떠나고 이우주(연세의대 명예교수)가 조수로 임명되어 전격경련에 관한 실험적 연구에 착수하였다. 같은 해 김영식이 연구생으로 체온에 대한 교감신경계의 작용에 관하여 실험하였다.
1942년 장운섭이 조수로 임명되었고 연구생으로 이상옥, 배영, 이종무, 서정주 등이 교실에서 연구하였다. 이 당시 약리학교실은 Martin의 사택 2층으로 이전하였으며 1층에는 생리학교실이 자리잡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자 약리학교실에 큰 변동이 일어나 이세규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전임하고, 장운섭은 내과로, 이상옥은 교통병원장으로, 김영식은 인천 도립병원장으로 떠났다.
1946년 이세규가 다시 교실로 돌아왔으며 박장희가 조수로 들어왔다.
1947년 이우주를 비롯하여 7명의 국내 약리학자들이 모여 조선약리학회를 창설하였다. 같은 해 김영우가 조수로 들어 왔으며 박장희가 임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1948년 홍사석이 조수로 들어 왔으며 김영우가 임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1949년 김성전이 조수로 임명되어 의욕적인 연구활동을 하였으며 같은 해 8월 약리학교실을 Avison관 2층으로 이전하였다.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출장강의를 시작하였다.
1950년 6.25 동란으로 교실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1952년 서울에서 다시 개교하자 이세규는 사임하고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옮겨갔다. 같은 해 미국 Wisconsin 대학교로 연구차 떠났던 이우주가 귀국하여 주임교수로 임명되었다.
1955년 조규철(현 가톨릭의대 명예교수)이 졸업과 동시에 조교로 임명되었다. 새로 보수한 Avison관 1층에 연구실을 차렸으나 동란으로 실험 설비가 파괴되어 연구는 부진하고 주로 학생 실습과 강의에 치중하였다. 이세규가 대한약리학회 회장이 되었다. 임순규가 기수로 교실에 들어 왔다.
1956년 1956년미국 Seattle의 Washington 대학교로 연구차 떠났던 홍사석이 귀국 하였다.
1957년 신영호가 조교로 임명되었다. 세브란스연합의학대학과 연희전문대학이 합병되어 연세대학교가 탄생하였다.
1959년 미국 Wisconsin 대학교로 다시 떠나 Ph D. 학위를 받고 교환교수로 근무하였던 이우주가 귀국하였다. 이우주, 홍사석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돌아오자 교실의 연구와 학생교육은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이우주가 중심이 되어 약리학교실에서 연구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한 자들의 모임인 세수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이들 박사학위 취득자들은 약리학 교실의 연구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이영숙이 사무원으로 임용되었다.
1960년 이전 까지는 주로 kymograph, U자 수은 manometer 등 고전적인 기구를 사용하였으며 당시에는 kymograph 종이에 benzene을 태워 그을음을 입히고 실험 후 이를 뜯어내어 묽은 니스(varnish)로 고정하는 것이 기본 업무였다.
1960년대에 들어 이우주가 NIH에서 $40,000의 연구비를 지원 받아 연구실험 기구를 현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China Medical Board의 지원으로 새로운 의과대학 건물이 신축되고 이곳 3층에 약리학교실이 이전됨과 동시에 연구실과 연구기기를 완비하게 되었다. 당시 가장 현대적인 기기로는 catecholamine 측정에 필수적이었던 Aminco-Bowman Spectrofluorophotometer, Beckman DU UV-VIS spectrophotometer, Polygraph, Refrigerated centrifuge, Electric balance, Deep freezer 등을 구비하였다. 이 당시 이러한 기구들은 최신의 것으로 spectrofluorophotometer나 UV spectrophotometer는 국내 유일무이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매우 소중히 다루었다. 특히 Beckman DU UV-VIS spectrophotometer는 홍사석 교수실에 설치하였고, 각각 silica cuvette은 특히 조심스레 다루었다. 그러나 당시로는 렌즈페이퍼나 tissue paper가 거의 없고 화장지도 보통 사람은 누런 재생화장지를 쓰고 흰색 두루 말이 화장지(이 역시 요즘 것보다 훨씬 거칠었다)가 가장 좋은 시절이라 silica cuvette은 흰색 화장지로 닦아 쓰곤 하였다. 유종섭과 조태순이 조교로 임명되었다. 이우주가 대학원장으로 임명 받아 1964까지 일했다.
1964년 주영명이 조교로 임명 되었다.
1965년 이향우가 조교로 임명되어 유종섭, 조태순, 주영명과 함께 이우주, 홍사석을 도와 활발한 연구 활동을 하였다. 홍사석은 Seattle 의 Washington 대학교에서 담낭 수축기전에 관한 연구를 한 후 귀국하여 교수로 임명되었다. 1960년 중반은 약리학교실이 매우 활발한 연구를 진행한 시기로 손꼽을 수 있다. 1960년부터 1964년 사이에 의대 졸업생만 8명이 교실에 조교생활을 한 것은 특기할 만 하다고 하겠다. 이 때 이우주의 미국 NIH 연구비와 China Medical Board 자금으로 많은 새로운 연구 기자재가 도입되었으며 catecholamine 연구를 비롯하여 수많은 논문이 Journal of Pharmacology & Experimental Therapeutics 등의 외국잡지에 발표되었다. 따라서 이 당시는 어떤 조교도 책상에 앉아 책을 볼 수 없을 만큼 바빴다. 또 책을 본다고 책상에 앉아 있으면 실험하지 않는다고 야단맞을 정도였고 이를 피하자면 빈 원심분리기 스위치를 켜고 옆에 서 있어야 했다.
1968년 김원준이 강사로 들어와 이자효소 단백분리를 연구하였다. 이후 그는 China Medical Board의 연수비를 지원받아 미국 Seattle 의 Washington 대학으로 1년간 연수를 다녀왔으며 국내에 등전집초법(isoelectric focusing)을 최초로 도입하기도 하였다.
1969년 이남희가 전임강사로 임명 되었다. Minnesota 대학교에서 돌아온 조규철은 귀국하여 신장약리학을 연구하였다. 이우주가 대한약리학회 회장이 되었다. 이신복이 사무원으로 임용되었다.
1970년 조규철이 가톨릭 의과대학 약리학 주임교수로 임명 받고 교실을 떠났다. 황영자가 사무원으로 임용되었다.
1971년 김경환(현 연세의대 교수)이 조교로 임명 되었다. 유종섭과 김원준이 미국으로 떠난 상태에서 이남희가 사직하기로 하자 교실에는 학생실습 등 교실 실무를 맡을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같은 갑작스러운 교실 사정 변화에 교실에서는 임상약리학을 발전시킬 목적으로 임상 수련과정에 있던 김경환을 인턴 수료 후 바로 조교로 들어오게 하였다. 같은해 미국 Minnesota 대학교 약리학 주임교수인 FE Shideman이 교환교수로 6개월간 약리학 연구 및 의과대학 교과과정 개편을 위해 공헌하였다. 한양의대 약리학교실이 신설되면서 출장 강의를 시작하였다.
1972년 홍사석이 주임교수가 되었다.
1973년 배영숙과 노재열(현 성균관의대 교수)이 조교로 들어왔다. 송성남이 사무원으로 교실에 들어 왔다.
1976년 배영숙이 이화의대 전임강사로 임명되어 전임해 갔다.
1974년 안영수(현 연세의대 교수)와 김혜영(이화여대 화학과 졸업)이 조교로 임명 되었다.
1975년 홍사석이 대한약리학회 회장이 되었다. 이우주가 연세대학교 총장이 되어 1980년까지 일했다.
1977년 이향우가 Temple 대학교에서 학위를 마치고 조교수로 임명되었으며 유경자가 산부인과학교실에서 약리학으로 옮겨왔다. 장계영이 사무원으로 교실에 들어 왔다.
1978년 미국 Brown 대학교 약리학 주임교수인 차승만이 교환 교수로 약리학 교육과 연구에 공헌하 였다. 홍사석이 의과대학장으로 임명되어 1981년까지 일했다. 김원준이 주임교수가 되었다.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이 신설되었다.
1979년 신윤용(현 이화약대 교수)과 김정희(현 영남의대 교수)가 조교로 들어 왔다. 임미원이 사무원으로 교실에 들어 왔다.
1980년 김경환이 영국 Newcastle 대학교에서 적출 관류 이자 모델을 이용한 이자외분비에 관한 연구와 미국 Brown 대학교에서의 연구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같은 해 조태순은 성균관대 약대 교수로 임명되어 옮겨갔으며 김동구(현 연세의대 교수)가 인턴 수료 후 조교로 근무를 시작하였다. 연세 원주의대에서 약리학강의가 시작되었다.
1980년대 초 차관사업으로 많은 실험 기구를 교체 또는 현대화하고 Ultracentrifuge, Beta-counter, Gamma-counter, Minicomputer, High pressure Liquid Chromatography 등을 도입하였다.
1982년 이향우가 부교수로서 성균관대 약대로 옮겨갔다. 홍사석이 주임교수가 되었다.
1983년 김원준이 대한약리학회 회장이 되었다. 이우주의 정년퇴임을 기념하여 창명학술기금을 마련하여 교실연구활동과 교과서 출판 등을 지원하였다. 이선미(현 성균관 약대 교수)가 조교로 들어 왔고 이한웅(현 연세대 이과대 교수)이 연구원으로 들어 왔다.
1984년 미국 Johns Hopkins 대학교에서 연구하던 차영남(현 인하의대 명예교수)이 부교수로 임명되어 약물대사 및 독성 연구를 하였다. 원주의대 약리학교실이 창설되었고 김원준이 파견 근무 하였다. '이우주의 약리학강의' 초판이 발간 되었다.
1985년 안영수가 미국 Baylor 의대에서 분자약리학을 연구하고 돌아왔고 김원준이 영남의대 학장 겸 약리학 주임교수로 임명 받아 교실을 떠났다. 김혜영(이화여대 화학과 졸업)이 Utah 주립대학으로 떠났다. 최재원(현 연세대 원주의대 교수), 노형근(현 가천의대 교수), 명창선(현 충남약대 교수)이 조교로 임명 받고 교실에 들어 왔다. 이경재가 사무원으로 교실에 들어 왔다.

1986년

김경환이 김원준 후임으로 원주의대 약리학교실에 파견 근무하였다.

1987년 차영남이 인하의대 약리학 주임교수로 전임되어 갔으며 원주에서 파견 근무 하던 김경환이 주임교수로 임명되어 복귀하였다. 고창만(현 연세대 원주의대 교수)이 원주의대로 전보되어 조교수로 근무하였다. 홍사석이 원주부총장으로 임며되어 1988년까지 일했다. '이우주의 약리학강의' 2판이 발간 되었다.
1988년 주일로(현 아주의대 교수)와 이경은(현 이화의대 교수)이 조교로 들어 왔다.
1989년 조교 수련 후 미국 Temple 대학교와 Wisconsin 대학교에서 면역약리를 전공하고 돌아온 노재열이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김경환이 문교부 연수기금 지원으로 1년간 영국 Manchester 대학교에서 이자효소단백 분비 기전을 연구하고 돌아왔다. 임종수가 기수보로 교실에 들어 왔다.
1990년 1990년대에 들어서는 분자생물학적 기법이 많이 도입됨에 따라 세포배양기, 각종 전기영동기구, DNA sequencer, cell harvester, PCR과 신경약리학을 위한 기구들이 도입되고 기존의 기구들을 추가 교체하였다.
미국 Minnesota 대학교에서 콩팥약리로 Ph D.를 받은 하헌주(현 이화약대 교수)가 전임강사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이민구(현 연세의대 교수)와 서정택(현 연세치대 교수)이 교실에 들어 왔다.
1991년 미국 Brown 대학교에서 Ph D.를 받은 박경선이 원주의대에서 약리학 연구를 시작하였다.
1992년 주일로가 아주대 전임강사로 임명 받아 교실을 떠났으며 강동원(현 관동의대 교수)이 조교로 교실에 들어 왔다. 김동구가 미국 Minnesota 대학교에서 행동약리학을 공부하여 Ph D.를 받고 돌아 왔다. 이해부터 1996년까지 대한약리학회 사무실을 운영하였다. '이우주의 약리학강의' 3판이 발간 되었다.
1993년 최재원이 Chicago 의대에서 분자약리학으로 Ph D.를 받고 돌아왔다. 김경환이 대한약리학회 회장이 되었다. 홍사석이 호암상 의학상을 수상하였다.
1994년 새로 생긴 연구전임 교원제도로 Rhode Island 대학교에서 Ph D.를 받은 김혜영이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이경은이 대구가톨릭의대 전임강사로 임명 받아 옮겨 갔다. 이서울과 민선자가 각각 조교와 사무원으로 임용 되었다.
1995년 김철훈과 김건태가 각각 조교와 기수보로 교실에 들어 왔다.
1996년 고창만이 미국 Georgetown 대학교에서 심장근육의 전기 생리학적 반응을 연구하고 귀국하였다. 안영수가 주임교수가 되었다. 교실의 전임교원이 늘어나고 각자의 연구분야가 다양해 짐에 따라 국제경쟁력을 갖춘 학문적 역량을 발휘하기 위하여 교실로서는 조직적인 연구분야의 정립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교실의 궁극적인 연구목표를 '세포내 신호변환기전(Intracellular Signal Transduction)'으로 정하고 연구분야를 중추신경약리와 소화기약리로 집중하여 연구를 진행시키기로 하였다. 아울러 연구분야를 보다 체계적으로 하기 위하여 생체실험 - 적출장기실험 - 세포단위실험 - 분자단위실험을 서로 잇는 유기적인 실험을 추구하기로 하였다.
1997년 Northwestern 대학교에서 신경과학으로 Ph.D. 를 받은 정광철이 조교수로 임용 되었다. 김경환이 대한의학회 기초의학 이사로 선임되었다. '이우주의 약리학강의' 4판이 발간되었다.
1998년 강동원이 관동대학교 전임강사로 임용되어 교실을 떠났다.
1999년 이민구가 미국 Texas Southwestern 대학교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서 상피세포 물질이동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임주원이 연구강사로 교실에 들어 왔다. 포천중문의대 출장강의를 시작하였다.
김경환이 BK21 의과학사업단장에 임명되었다.
2000년 장정원(현 서울치대 교수)이 연구전임 조교수로 임용 되었고 노재열과 하헌주가 각각 성균관대 의대와 순천향대 의대로 옮겨 갔다. 안영수가 대한약리학회 이사장이 되었다. 안영수가 대한의사협회 학술이사가 되었다.
김동구가 제19회 '올해의 교수상' 에 선정되었다.
2001년 이우주가 자서전을 출판하였다. 김동구가 교학부장이 되었다. 이민구가 분쉬의학상 젊은 의학자상을 수상하였다.
2002년 김경환이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에 선임되었다. 안영수가 대한의사협회 학술이사가 되었다. 이민구가 의사협회 선정 “우수 한국인 의과학자 20인”, 한국과학재단 2002년 우수연구성과 30선 선정되었다. 정광철이 연세대학교 생물학과로 옮겼다.
2003년 "이우주의 약리학 강의" 5판이 발간되었다. 김경환이 제9회 아시아태평양 약리학 학술대회 조직위원장이 되었다. 김경환이 대한임상약리학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김동구가 대한의학회 학술진흥 겸 기초의학이사로 선임되었다. 이민구가 보건복지부 약물유전체연구사업단 약물수송체유전체 중점연구 센터에 선정되었다.
2004년 김경환이 의과대학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김경환이 대한민국의학한림원 정회원에 선임되었다. 안영수가 제23회 '올해의 교수상' 에 선정되었다. 안영수가 대한민국의학한림원 정회원과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회원에 선임되었다. 김동구가 주임교수가 되었다. 김혜영이 계연학술상을 수상하였다. 이민구가 제17회 보원학술상을 수상하였다. 박경수가 들어와 임상약리 연구를 시작하였다.
2005년 김혜영이 연세대학교 연구업적 우수 교원에 이민구가 연세대학교 연구업적 최우수교원, 의과대학 우수교수상에 선정되었다.
2006년 안영수가 연세의료원 대외협력본부장에 취임하였다. 김동구가 한국뇌신경과학회 이사장이 되었다. 김혜영이 연세대학교 식품영양학과로 옮겼다. 장정원이 서울대 치대로 옮겨 갔다. 김철훈이 미국 국립 보건원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글루타메이트 수용체 연구를 시작하였다. 2단계 BK21사업에 전 교수진이 선정되었다.
2007년 김경환이 연세의대 동창회 공로상을 받았다. 안영수가 연세의대 동창회 기획이사가 되었다. 이민구가 제14회 의당학술상에 선정되었다. 김동구가 장로회 신학대학 감사장을 받았다. 김주영이 전임강사로 임용되었다.
2008년 이민구가 교수로 승진하였다. 정재용이 전임강사로 임용되었다. '이우주의 약리학강의' 6판(안영수 엮음)이 발간 되었다.
2009년 박경수가 부교수로 승진하였다. 김주영과 정재용이 조교수로 승진하였다. 의과대학 연구경쟁력 우수 교실상(기초학부문)을 받았다. 김동구가 연세대 평생교육원 우수강사상과 제 12차 한국뇌신경과학회 추계학술대회 및 총회에서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이민구가 2009 연세대 우수연구실적표창을 받았다. 김철훈이 2008년도 연구 우수교수상을 수상하였다.
2010년 김철훈이 부교수로 승진하였다. 김철훈이 한국의학원-젊은기초의학자상을 수상하였다. 이민구가 2010년 교육과학기술부 기초연구 우수성과 인증패와 2010학년도 연세대학교 우수업적교수상을 받았다.

2011년

2011년 안영수가 연세대 약학대학 초대학장으로 임용되었다.  이민구 연구실에서 Cell지에 논문을 게재하였다.  김경환이 정년퇴임을 하였다.

2012년

이민구가 주임교수가 되었고, 정재용이 서울의대 임상약리학과로 옮겼다. 김철훈이 미국 Stanford Univ.로 연구출장을 떠났다. 이민구가 2011학년도 연세의대 연구활동 우수교수상-연구공로상, 2012 교육과학기술부 기초연구 우수성과 인증패,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우수학위 논문지도 교수상을 받았다.

2013년

‘이우주의 약리학강의’ 제7판(김동구 엮음)이 출판되었다. 김동구가 2012년 우수업적교수로 선정되었다. 김철훈이 미국 Stanford Univ.에서 연구출장을 마치고 돌아왔다. 이민구가 연세대학교 에비슨특훈교수로 선정되었다.

2014년

박경수가 교수로 승진하였다.

2015년

김철훈이 교수로, 김주영이 부교수로 승진하였다. 김형범과 지헌영이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김철훈이 제13회 화이자의학상-기초의학부문을 수상하였다. 김형범이 제8회 아산의학상-젊은의학자부문을 수상하였다.

2016년

 

안영수가 정년퇴임을 하였다. 박경수가 주임교수가 되었고, 김형범이 부교수로 승진하였다.
김철훈이 2015 연세의대 연구활동 우수교수상(기초학부문)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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