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인메뉴로 바로가기
콘텐츠 바로가기
하단메뉴로 바로가기
패밀리사이트 바로가기



교실소개

HOME 안에 교실/학과 안에 기초학 교실 안에 생화학-분자생물학교실 안에 교실소개

안녕하세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분자생물학교실입니다.

저희 교실은 생명과학의 근원이 되는 생화학-분자생물학 분야에서 기초 및 응용 분야의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으며, 또한 의과대학 생화학 과정을 통하여 미래 의학계를 이끌어 나아갈 인재들에게 미래에 대한 비젼을 제시하고 연구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1992년부터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내에 본 교실 중심의 유전과학 연구소를 창설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1994년부터 매년 초에 전국의 의과대학 교수와 생명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과학자를 대상으로 분자생물학 실험에 대한 워크샵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교실에 대한 문의사항이나 기타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http://biochemistry.yonsei.ac.kr 의 게시판을 이용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분자생물학교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성산로 250 (신촌동 134)
Tel : (02)361-5180, 5187
Fax : (02)312-5041

생화학-분자생물학교실에 대하여

1885년 4월 14일 알렌의 요청에 의해 광혜원이 설립되고, 13일 후 제중원으로 개칭한 후 1886년 3월 29일에 학생 16명을 모집하여 의학교육을 실시한 것이 우리 나라에 있어서 서양 의학교육의 시작이었다. 정규 의학교인 제중원 의학교는 1899년에 정식으로 설립되었고, O. R. Avison이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1886년에 입학한 학생들의 경우 의사를 양성한다는 목적보다는 의사의 조수를 양성한다는 표현에 더 가까웠을 정도로 초기에는 제대로 된 의학교육을 실시할 수가 없었다. 이때 학생들에게 가르친 과목은 해부학, 화학, 생리학, 세균학, 위생학, 약물학 등이었는데 각종 문서에는 1886년부터 1912년 사이에 여러 과목의 교과서 (화학 포함) 편찬 및 화학 강의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1회 졸업생 (1906)인 金淳弼과 애비슨 교장이 함께 번역한 유기화학(1909) 교과서가 현존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유기화학에 관련된 내용은 물론 대사에 관한 내용도 일부 포함되어 있으므로 생화학 과목이 독립하기 전의 학습 내용을 소상히 알 수가 있다.

세브란스 의학교는 설립 초기에 미국 북장로회에서 단독으로 운영하였으나 1912년 5월부터 5개 교파 선교회(북장로회, 북감리회, 남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호주 장로회)에서 공동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북감리회 소속으로 공주에서 선교병원 책임자로 근무하던 밴 버스커크(J.D. Van Birskirk)가 북감리회 대표로 세브란스 연합의학교에 부임하여 1912년부터 1928년까지 의화학(생화학)과 생리학 강의를 담당하였다. 1926년 10월 Ueber Glykolyse라는 연구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李錫申은 5개월전에 연구를 끝마치고 그 해 5월부터 백림 국립병원 가이제린 아우그스테 빅토리아하우스에서 조수로 재직하다가 1928년 2월에 귀국하여 11월부터(27년 10월부터라는 기록도 있음) 1931년 3월까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재직하면서 1928년 4월부터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강사로 임명을 받았다. 이석신이 생화학 주임교수로 취임을 한 후 밴 버스커크는 생리학만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석신은 1932년 2월에 교수로 승진하고 1944년 12월 12일 작고할 때까지 연세의전 생화학교실을 이끌어 왔다. 그는 1932년에 일본경도제국대학에서 朝鮮の 習慣食に 就いて라는 논문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33년 3월에는 동교 교수가 되었으며,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이화여자 전문학교의 영양학 및 생리학 강사로서 강의를 맡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독일에서 수학한 최신 생화학 학문을 바탕으로 본 교실의 학문적 발전에 기여하였는데 교실의 체제정비 및 발전의 토대를 구축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1944년 12월 12일 밤 11시에 腦出血發作으로 별세하여 남대문 예배당에서 학교장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정구충은 "한국 의료의 개척자" 책에서 유일준(세균학), 윤일선(병리학)과 더불어 이석신을 192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3인의 기초의학자로 이야기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글루코스에 관한 그의 연구업적이 찬란했으며 귀국후 세브란스에서 연구한 수형자의 영양과 신진대사에 관한 보고는 10회에 걸쳐 광범위하게 발표되었는데 이는 전쟁말기의 물자부족과 나쁜 환경에서의 상황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학송(1932년 졸업)은 1934년에 조교로 1년, 권석근(1932년 졸업)은 1938년에 조교로 1년간 근무하였다. 이학송은 朝鮮醫報 제 6권 6호에 肝臟糖原量- 이라는 논문(主任 이석신 교수)으로 전국 생화학교실 중에서는 처음으로 논문을 발표하였고, 朝鮮醫師協會 第 2回 學術演說會 硝錄에는 弗素의 家兎血液殘餘窒素量에 미치는 影響이라는 논문으로 전국의 생화학교실중 유일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또 30년대에 수시로 열리던 의사 좌담회에는 생화학교수중 이석신 교수가 유일하게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당시 이석신 교수가 생화학의 선구자로 활약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45년 1월부터 해방 후 격동기까지 잠시 동안 생리학을 담당하던 金鳴善이 생화학 강의를 맡게 되었고, 생리학 조교수 차영선이 생화학 실습을 담당하였다.

1947년에 세브란스 동문 교수로는 金相玟이 처음으로 생화학교실에 부임하였다. 1931년 본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오가야마 의과대학 생화학교실의 오가야마 교수 지도로 膽汁酸 연구로 1943년 7월 박사학위를 취득한 金相玟은 귀국 후 평양 연합병원 소아청소년과에 재직하였는데 해방 후 평양 의학전문학교를 인수하여 생화학교실의 재건과 학생교육을 위해 기여하였으며, 1947년에 월남하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생화학교실을 이끌어 나갔다. 1950년 6.25 동란을 맞이하여 50년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향하여 전진하던 중 유엔군이 세브란스를 파괴하지 않으려고 인민군 후퇴를 강요하였으나 끝까지 듣지 않으므로 9월 23일부터 세브란스를 폭격하게 되었는데 25일 낮 김상민은 그 폭격을 피하려고 세자녀와 함께 방에서 나와 정원에 설치한 방공호에 들어가려는데 폭격을 당하여 네 식구가 절명하였으며 방에 남아 있던 부인과 어린 딸, 그리고 아들만이 살아남게 되는 참상을 당해 순직하였다.

1947년 졸업생인 白雲基는 1947년 6월 8일부터 생화학교실 조교로 재직을 하다가 이화여자대학교 조교를 거쳐 도미하였으며, 동기인 李吉求도 1947년 9월 12일부터 1948년 10월 1일까지 조교로 재직을 하였다(10). 또 1949년에는 그 해 졸업생인 김용현이 1년간 조교로 있었다.

김상민의 사망 후 휴전 직후에는 김명선이 1952년 2학기에 강의를 맡았고, 1953년 3월부터 9월까지는 연세대학교 이공대학 화학과 교수 이영우가 외래강사로서 강의를 맡았다.

휴전으로 세브란스가 서울로 복귀한 1953년 10월에 역시 동문인 宋正錫(1941년 졸업)이 부임하였다. 송정석은 졸업 후 1942년부터 일제하에서 고생하던 우리나라 서민진료 사업에 전력하였고, 1948년부터 전주 예수병원에서 내과 과장을 역임하다가 1951년 미국으로 건너가 테네시주 내슈빌시 밴더빌트(Vanderbilt) 대학원에서 "The effect of whole body X-ray irradiation upon the urinary excretion of vitamin B6 by rats."라는 논문으로 생화학 석사학위를 취득(1953)하였다. 그는 부임과 함께 생화학 강의 및 실습을 담당하여 1976년 2월 퇴임할 때까지 본 교실에 재직하였는데 특히 6.25 동란으로 파괴된 본 교실의 재건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봉사하였다.

1961년에 생화학 강의 내용을 엮어서 우리말로 된 생화학교재를 펴냈으며 또한 생화학 실습을 위한 간단한 교재도 편찬하여 원서 중심으로 불편을 겪던 학생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었고, 1956년부터는 비타민 C에 관한 연구를 적극 추진하여 한국인을 대상으로 혈청 및 인간의 우유 내에 존재하는 비타민 C의 계절적 변동 등 많은 연구업적을 남겼다. 1964년 3월부터 1977년 4월까지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시간강사, 1966년부터 68년까지 대한생화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회장 재임시인 1967년 한국생화학회를 창립하여 의사와 비의사인 생화학자가 함께 모여 학술 활동을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였으며 1973년 한국 생화학회 회장(1974년까지) 재임시에는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국제생화학 기구의 하나인 Federation of Asian and Oceanian Biochemists(FAOB)에 정회원으로 가입시켜 우리 나라의 학술활동이 국제적으로 활약할 수 있도록 공헌하였고, 우리말에도 조예가 깊어 우리말의 語源考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1956년에는 그 해 졸업생인 金濟炫이 조교 생활을 시작하고, 이듬해에 金允洙가 참여하여 학생교육 및 연구활동이 활성화되는 전기가 마련되었다. 金濟炫은 그동안 본 교실을 위해 많은 봉사를 하였는데 1961년에 전임강사가 된 후 1963년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교실로 전임하여 떠났다가 1966년에 조교수로 본 교실에 복귀하였다. 이후 1967년 미국 로체스터(Rochester) 의과대학 생화학교실에서 간장관류에 대한 연구를 마치고 귀국하여 교수로 재직하다가 1975년 9월 퇴임하여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으며(교무과 처리는 1976년 2월 퇴직), 한때는 노르웨이 오슬로 우레볼 병원 연구원, 中國臺北 美海軍醫學硏究員 등 해외에서 종횡무진 한국의 의술을 선양한 실력파 교수로 그 박식한 기량과 풍부한 식견은 학생들 사이에 신망이 높으며 또한 憧憬의 대상이 되었다.

金允洙는 미국 네브라스카 주립대학교 의과대학에 유학하여 생화학교실에서 "A study of riboflavin and a homolog of riboflavin in cellular processes."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같은 대학의 조교수로 1년 동안 재직한 후 귀국하여 본 교실의 전임교수로 부임하였다. 그는 1975년부터 1977년까지 미국 메릴랜드대학교 생화학 초빙교수로 근무하기도 하였는데, 귀국 후에는 생화학 교과 내용을 진료와 진단에 필요한 질병중심으로 개편하였으며 연구활동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의 연구는 80년대 중반까지 주로 미토콘드리아 내막에 존재하는 NAD 및 FAD dependent dehydrogenase와 그 효소의 반응속도연구(kinetic studies)에 관한 것이었고, 80년대 후반부터 정년퇴임(96년 8월)까지는 지방대사와 관련된 효소에 관한 것으로 이 중 15편의 연구논문을 국제 과학잡지에 발표하였고, 미국 Federation Proceeding 국제회의를 비롯한 외국과학 회의에서 17회에 걸쳐 발표하여 우리 나라 생화학의 국제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미국 조지아주립대학에서 영양학 전공으로 석사를 취득한 뒤 1955년 9월부터 1958년 까지 코넬대학교 대학원에서 영양학 연구조교 생활을 한(2) 李琦烈은 1958년 3월 본 교실에 부임하여 1965년 부교수로 진급한 후 연세대학교 가정대학으로 전임할 때까지 한국인의 영양에 관한 연구를 실시하였다. 1964년에 조교로 들어온 김현옥은 영양학을 전공하였으며 73년 강사, 77년 부교수를 거쳐 78년에 퇴임하였다.

생화학교실이 발전을 이루게 된 전기는 60년대 후반 차이나 메디컬 보드(CMB)의 지원을 받아 많은 최신기재를 도입하고 한국과학재단 등 여러 단체로부터 연구비 지원을 받아 교실의 연구분위기 및 시설을 현대화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1982년부터 1983년 사이에 학교당국의 OECF 차관 도움으로 생화학 연구에 필요한 기본적인 연구 기재를 도입하여 세포내의 생체 분자를 분자 선상에서 연구 구명하는데 필요한 시설과 여러 가지의 현대 연구 기술을 본 교실에 정착시켰으며 생화학 연구내용과 성격이 크게 달라져서 현대 생화학 발달의 기틀을 마련하고 연구내용을 질적으로 향상시켜 놓았다.

교실의 식구가 늘어남에 따라 학교교육 및 연구가 매우 활성화되었는데 특히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적으로 생명과학이 발전하는 것과 함께 본 교실에서도 세포내 분자물질들에 대한 연구에 박차를 기하기 시작하였다. 교수 김윤수는 1979년에 학생교재로 [생화학](Illustrated with Figures and Table, p575)과 [실험 문제풀이 생화학](p321)을 집필하였으며, 1961년부터 1975년까지 교수 송정석이 집필한 생화학교재(p295)를 1979년, 1982년, 1984년에 걸쳐 대폭 수정, 개정판(p685)을 출간하여 학생 교재로 사용하였다. 이 생화학 교과서는 제2판(1988), 제3판(1993)으로 증보 개정되었다.

1992년에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내에 생화학교실 중심의 유전과학 연구소를 창설하여 창설 3년만인 1995년, 연세대학교 산하 79개의 연구소중 우수 연구소로 평가를 받았으며 이 연구소에서는 매년 [Focus on Genetic Science]라는 학술 전문지를 발간하고 있고, 1994년부터 매년 초에 전국의 의과대학 교수와 생명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과학자를 대상으로 분자생물학 실험에 대한 워크샵을 실시하고 있다.

1996년 3월에는 생화학-분자생물학교실로 개칭하였다.

현재 본 교실의 전임교원들은 모두가 각자의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활동을 전개하여 상당한 업적을 남기고 있으며, 아울러 학생강의와 실습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도 계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콘텐츠 처음으로 이동


네크워크 링크안내/사이트 정보